언제나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시기가 있다. 전화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기. 돌이켜보면 휴대폰을 가지게 된 이후 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 오면서 전화 통화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인 적도 많이 있었다. 중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 아이는 단 한번 만나는 걸로 끝이 났었다. 인터넷으로 만나 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정말 풋풋한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한 아이였다. 결국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다는 것이 쉽게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핑계가 되어주었다. 그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받지 않았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다시는 연락이 오질 않았다. 그 전에 있었던 은혜라는 아이는 초등학교 때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우연치 않은 기회에 인사를 하게 되고 결국 적극적으로 대쉬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설래는 마음을 안고 그애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그애 어머니가 받으셨고 정말 잊지 못할만큼 크게 혼나고야 말았다.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말은 위로가 되기 보다는 결국 그렇게 오랜 짝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일이 되고야 말았다. 시작도 못할 거라면 그냥 아련한 추억이라도 되어줄 것이지 왜 괜한 인연을 만들어 순수함이 더렵혀지는 느낌을 받게 했을까. 모든 것들이 내 잘못이지만 그 때 상처는 너무나 컸다.
재수할 때 너무나 좋아했던 은정이와는 정말 많은 통화를 나누었다. 한달 통화 비용이 상상도 못할만큼 나왔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신경쓸 수 있는 건 아마 그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어떤 여자와도 그렇게 오랜 시간 통화하면서 맹목적인 관계를 꿈꾸지 못하고 있으니까. 어른이 되기 마지막 단계에 만난 여자가 은정이었고 그 애도 어렸기 때문에 9개월 동안 전화통화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다가 결국 사귀게 되어 2주 만에 깨지게 되었다. 물론 결정적 잘못은 나에게 있었으나 뭐랄까 지나친 전화통화로 서로에 대한 환상은 깨어지고 오해만 잔뜩 커진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밤 늦게 여자와 통화를 하면 은정이 생각이 나곤 한다. 그 때 느꼈던 일탈감과 환희 그리고 엄청난 충격은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 가장 치명적인 독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 뒤 어떤 여자를 만나더라도 이 전화라는 것이 계속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결국 관계를 끊어버리는 역할도 해주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모든 것들에 전화가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해리와 2번 통화를 했고 그 시간을 합치면 약 2시간에 육박하게 되었다. 얼마 전만 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특히 사진을 보고 해리는 소개팅을 하지 않으려 했던 여자였다. 사진이 유난히 못나온 탓도 있지만 얼굴도 모르고 소개팅을 한 것이 벌써 3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출은 어려운 일이었고 피곤함과 허무함 그리고 실망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강행한 해리와의 소개팅은 즐거운 시간으로 기억되었고 부담없이 친근하게 문자와 전화 통화를 주고 받고 있다. 오늘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가지고 있는 고민이나 부족한 면을 많이 이야기 하게 되었다. 가식의 단계를 지난 것이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이 해리라는 여자에 대한 호감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말 실수도 거의 하지 않고 예의 바르다. 허튼 소리도 하지 않고 거슬리는 면이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다른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조금만 이야기 해도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유학 이야기도 하고 장래 이야기도 나누었다. 오늘 아침 어머니랑 나눈 아버지 이야기 때문에 기분이 너무나 좋지 않을 하루였으나 그래도 해리 덕분에 참 즐겁게 생각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이제 나도 면역이 생겨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더 이상 작용하지 않게 된 것만 같다. 원망을 하던 저주를 하던, 아니면 측은한 마음에 동정을 하건 이젠 어떤 마음도 갖지 않고 그냥 모른척, 무심히 행동하고 싶다. 물론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오랜 동안 아버지에게 경제적 의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어찌하겠는가. 더 이상 신경쓰다가는 내 자신이 망쳐져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드는 것을.
해리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남녀 관계는 동등해야 한다. 그리고 약간은 남자가 여자를 감싸 주어야 가장 아름답고 바람직한 남녀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해리는 좋은 여자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접촉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2번의 통화를 나누면서 직접 만나러 가지는 못했다는 것이 문제다. 만약 정말 내가 눈이 멀었다면 당장 달려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환상적인 연애를 기다릴 나이에 여자다. 기말 시험이라는 복병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해리가 너무 바쁜 스케줄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생각하자 직접 만나는 것 말고는 상대를 알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해리를 갖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더 잘알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만나고 이야기하고 직접 겪어보아야 한다. 아직 모를 일이다. 확신도 서지 않았다. 고백을 한다는 것도 우습다. 아직 2번 만난 사이다. 말을 놓고 편안하게 대한다는 것은 있지만 아직 너무나 서먹한 사이라는 거다. 사귄다는 말은 적어도 2달 이상은 만나보고 해야 하지 않을까. 여자 입장에서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옳지 않을까. 좀더 세련되고 고단수의 방법을 쓸 필요가 있다. 어느 순간 너무 해리에게만 신경을 쓰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은혜나 동희는 어느 순간부터 연락을 끊게 된 걸까. 연락을 끊고 지내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친구라도 편하게 지내는 것을 원하는 건가. 해리가 결정된 것도 아닌데 왜 허튼 집착을 보이는 걸까. 해리는 많은 남자들을 알고 있고 그 남자들은 나보다 더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여건에 있다. 훨씬 나은 조건의 남자도 있을 것이다. 신중해야 한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전화는 한계성이 있다. 그 한계성에 도달하기 전에는 참 좋은 수단이다. 좋은 점까지만 이용하자. 그리고 그 이상이 넘어가면 해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가끔은 무모한 행동이 필요할 때도 있다. 잘 생각하자. 모든 것은 신중하고 철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질 일이다. 지나친 자만은 금물이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해서도 안된다. 원래 연애가 그렇다. 어렵고 힘든 일이다. 조심스럽게 마음 속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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