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이에게 이런 말을 꺼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상이 바로 너라고...그 크라이막스를 가기 위한 전조였을까. 그 결정적 순간까지 도달하기 전에 끊은 것도 나였다. 아이러니하다. 자신이 없어서일까? 왜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면서 그 대상자에게 그런 말을 하면서 그 사람이 너라는 말을 아끼는 것일까.
예림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일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분명 사실이다. 미지의 동아리와 미지의 두 남자. 그리고 그 형이라는 사람에 대한 예림이의 마음은 다른 남자들을 그냥 친구로 받아들이게 만들만큼의 매력이 있나보다. 어떤 계기가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첨부터 그런 매력을 지닌 사람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예림이의 마음 속엔 그사람에 대한 생각,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마지막에 예림이에게 한 말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큰 실수. 나에게 누군지 물어보면 알려주겠다는 그 말은 분명 큰 실수다. 그것은 내가 누군지 말하면 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예림이는 남자친구가 있는 블루엔진 동아리 사람 중에 한명이라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자신이 아닌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다. 반전의 묘미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 내가 한 이야기는 예림이와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였지 예림이의 진실 고백을 위함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나 진실 고백이 되어버렸고 난 의욕을 잃어버렸다.
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건 아니다.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누구든지 사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 자연스런 생활 속의 융합이 아니라면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머뭇거려진다. 시간은 없는데 장벽은 더 커져버렸다. 속에 있는 말을 했다고 해서 예림이까지 그런 말을 해버리다니. 만약 예림이가 말한 동아리가 블루 엔진이라는 동아리고 그 동생이 중락이 그 형이 나라면 이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정말 기막힌 우연의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 형제라는 단서가 너무 크게 자리 잡았고 그 것 때문에 허튼 기대도 못하게 되었다. 야속하다. 친형제라는 그말이.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간사하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난 주 월요일만 해도 해리에 대한 마음이 충만했는데 이제는 그 대상이 예림이가 되었고 이 마음도 다음 주면 이제 기회가 없다는 것으로 사라지는 형국이 될 것만 같다. 아쉽다. 서글프다. 결국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은 그대로 인데 그 마음이라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여자는 계속 바뀌고 있고 어김없이 내리고 있다. 누구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는다. 그 사람들이 앉았다가 나갈 때마다 점점 더 큰 공허함을 느끼며 쓸쓸함을 느끼고 있다.
예림이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기에 그대로 멈춰있는 중이다. 난 예림이를 좋아한다. 예림이에게 했던 상담의 내용은 거의 거짓이다. 그만큼 좋아한다면 이미 고백했을 것이고 그 여자가 너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금 난 예림이를 사귀던 해리를 사귀던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가 된다. 해리가 나에게 좋아한다 고백한다면 난 예림이에 대한 마음 때문에 해리를 거절할 수 있는가. 그 반대로 예림이가 나에게 그 형이 사실 오빠라고 말한다면 해리를 위해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가. 아니다. 어차피 난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이 아닌 세사람 네사람 그 이상의 무한히 많은 여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 할 수도 함께할 수도 있다. 난 아직 절대적 사랑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오늘 했던 행위의 전부가 단순히 상대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한 고단위 수단에 불가하고 그 덕분에 성급한 비참함 속에 빠질 뻔한 나를 구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돌진하는 돈키호테 사랑은 이미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식으로 나아간다면 매력있는 누군가를 사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어찌하겠는가. 인생은 기적과도 같은 확률을 현실이 되리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인 것을.
예림이가 한 말 중에 희망이 섞인 말도 있다. 그 형이라는 남자를 내가 말하는 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오랜만에 느껴본 호감이라고 말한다. 그 호감이란 말이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 많은 남자들이 예림이에게 품는 호감정도라면 그리고 내가 예림이에게 품는 호감정도라면 그건 별 것 아닌 것이다. 눈이 높은 한 여자가 오래간만에 괜찮은 남자를 본 것에 불과한 일이다. 그건 단지 본 것에 불과하다.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우선 그럴 기회가 없다. 이번 논문에 동참하는 일도 지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리고 곧 끝이 다가온다. 정치 아카데미는 이번 주가 끝이다.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개강하고 학교 다니면 우연히라도 볼 기회는 전무하다. 메신저를 열심히 매복해야만 겨우 말을 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비참한 일이다. 이벤트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은 첫 만남에 서로 반하여 사귀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즉 이제 어려워진다는 것이며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를 찾을 것이란 결론이다. 비참하지만 현실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난 지금 기회를 잃고 있다. 가장 큰 좌절의 원인은 예림이의 마음 속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친 형제라는 단서와 시간이 조금 지났다는 말. 나와 함께 있을 때 걸려온 전화에 누가 와 있는지를 물어보던 예림이의 집요한 추긍. 아마도 이 모든 것이 그것도 연결 되어 있다면 분명 누군가는 존재하고 있고 그 존재를 치워내지 않은 이상 예림이에게 다가가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괜히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여기는 정치 아카데미이고 나에겐 또다른 장소다. 소문이 나서는 안된다. 내가 예림이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 말이다. 이건 나의 입지와 지금껏 쌓아온 이미지를 한 순간에 사라지게 만든다. 이대로 지켜나가는 것이 좋다. 예림이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고 친절하지만 아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승산 없는 경기를 걸어서는 안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나 적다. 예림이보다는 오히려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들이 더 승산이 높아 보일정도니 예림이는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오늘 상담은 전반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고 결국 최소한 현상 유지, 아무 것도 잃지 않고 끝낼 수 있는 여지와 안전장치를 마련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큰 소득이라 평하고 싶다. 내 중심을 잃지 않고 다가갔으니 다행이다. 신중해라. 만약 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내밷게 된다면 그것 역시 인정할만한 것이지만 그것 아니라면 여전히 실수 투성이인 미성숙자일 뿐이다. 좋아할수록 신중해져라. 많은 정보와 많은 관계를 나누어라. 그래야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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