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ugust 15, 2006

원하는 건 원하지 않는다는 것



4시에 약속이 있다는 해리에게 12시에 연락 하며 만나러 가겠다고 한건 사실 고집이었다. 외대에 도착 예정을 잡은 시간은 2시. 그렇다면 겨우 2시간 얼굴 보고 다시 돌아선다는 결론이다. 왜 그런 고집을 피운걸까. 그렇게 해리가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다.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난다는 것에 대한 떨림도 없고 사귀고 싶다는 생각, 사귀고 나서의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외대 역이라는 곳을 가보았지만 왠지 모를 그 익숙함. 그리고 권태로움의 기조가 몸을 파고 들었다. 해리를 본건 외대 정문 앞이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걸어오는 해리는 멋진 모습이었다. 성숙한 듯 보이는 옷차림과 시원한 이목구비, 그리고 하얀 얼굴과 힐을 신어 나보다 더 커보이는 키. 모든 것이 이미 알고 있듯이 너무나 멋진 모습이었지만 흥분과 떨림은 전보다 훨씬 덜하였다.

해리에게 이끌려 간 곳은 자주 간다는 술집이었다. 그곳에서 돈까스를 먹고 자주 간다는 카페에 갔다. 외대는 학교도 작지만 주변 모든 시설이 너무나 작다. 규모도 작고 종류도 적다. 소시민 적인 느낌이 들 정도다. 해리는 계속해서 자기 일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사실 지루한 느낌을 받았다. 나에 대해서 묻는 것도 아니고 자기 이야기에만 열을 올린다. 아니 열도 올리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싫기 때문에 먼저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서 이어가는 것 뿐이다. 중간 중간 새어 나오는 해리의 사생활이 귀에 거슬린다. 다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에게 하는 친절과 행동도 결국 그들에게 하는 똑같은 것들의 복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어떤 친한 다른 존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건 자명해 보였다. 어쩌면 그들보다 못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나와 해리의 공유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이야기의 주제를 쉽게 이끌어 가는 것이 장점인 내가 해리와 있으면 단 한번도 이야기의 주제를 끌어오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로써는 알지도 못하는 자기 이야기를 늘어 놓는 여자 앞에서 어떤 주제를 도출할 수 있겠는가. 길어야 1년 안에 외국으로 나갈 것이라는 전제를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깔고 시작하는 여자가 바로 앞에 앉은 남자를 사귈 수 있는 대상자로 본다는 착각을 하기엔 너무나 많은 걸 알고 있는 나이다.



정신 없이 2시간을 딱 맞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내 마음은 텅빈 의자처럼 공허했다. 만나면 만날 수록 즐거워지고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는 안타까움이 너무 컸다. 오히려 4년이나 사귀던 전 여자친구에게서 느끼던 그 권태로움의 한 자락이 느껴지는 섬뜻한 경험까지 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는가. 나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잘하는 여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왜 숨막힘을 느끼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을 느끼는 걸까. 해리 위에 군림하지 못해서? 그런 여자를 원한다고 떠들고 다녔으면서 막상 그런 여자를 만나니 소외감을 느끼는건가? 이중인격자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듯 하다. 귀보다는 입이 열린 여자라서? 한 없이 지루한 표정이나 짓고 앉아 있는 다른 여자애들 보다는 훨씬 낫다. 물론 가장 원하는 이상형이 아니기에 이러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다.



얼마나 더 갈아타고 가야 집으로 갈 수 있는건가. 사귀고 싶은 여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정상인가? 분명한건 지금 이상태로는 해리는 사귀고 싶은 여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보류상태가 되어버렸다. 내가 원하는게 무엇일까. 그녀? 사랑? 해리? 지금 내 행동을 보면 해리와 사귀는 것이 잘못이라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우연히 마음에 들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감각에 의존하는 듯 보인단 말이다. 그 노력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잠에서 일어나 부랴부랴 달려가 대책없이 부딫쳐도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기만 한다.


밤 늦게 만난 정규형은 나에게 더 좋은 여자들을 봐서 그런거 아니냐는 말을 한다. 더 좋은 여자? 더 좋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외모? 외모는 더 나은 여자들을 많이 알게 된건 사실이다. 그것 이상은? 모른다. 아직 해리 말고는 누구를 안다고 할 수 있을정도의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리는....좋은 여자지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해리는 연예를 꿈꾸지 않는 여자다. 그리고 남자에 대한 절박함이 전혀 없는 여자다. 또한 자기의 삶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손상시킬 일은 서투르게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또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다 우발적으로 내일 함께 사진 찍으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냥 바쁜 일이 있다고 거절했으면 그렇다고 생각했을 텐데. 갈 수 있다고 하더니 열심히 계획을 짜고 있는 도중 연락이 와 선약이 있었다며 계획을 파기한다.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면서도 이 모든 것들이 해리와 나와의 관계가 이대로 정리되려는 징조처럼 느껴지기에 불안하기만 하다. 문제가 해리에게 있다는 건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있다. 사귀는 것 자체가 두렵다. 나를 좋다고 직접 dash하는 여자가 아니라면 두렵다. 내가 맞춰주어야 하고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두렵다. 해리를 거부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거부의 원인도 나에게 있다. 아직 누군가를 사귈 때가 아니다. Posted by Pic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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